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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사회적 연대의식으로 잠을 깨워라 |

현장조합원 | 2005-08-23 10:13:52

조회수 : 1,458

노동·시민운동 사회연대를

 [대안경제를 말한다 ⑧] 노동운동, 사회적 연대의식으로 잠을 깨워라
  
노동운동이 바라보는 시민운동은 계급이 실종된 회색의 영역이다. 심지어 노동이 탈색되어버린 유한계급의 운동이라는 관점조차 심심찮게 마주친다.

 그렇다고 오늘의 노동운동이 ‘계급실현의 도구’로 비난받을 만큼 고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노동운동은 대기업 정규직의 ‘집단이기주의’라고 비난까지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조의 파업은 ‘배부른 귀족노조의 자기 잇속챙기기’ 정도로 폄하받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정부와 재계의 연합공습이나 ‘거짓말 기계’인 언론의 장난으로 돌려버리고 말 일은 아니라는데 있다. 노동운동도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독재정권이 강요한 기업별 노조체계의 유산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사회적 안전망조차 없는 상황에서 내 코가 석자이기도 하였다.결과적으로 노조는 양극화된 노동시장의 상층부에 안주하여온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노조의 잘못만으로 매도한다면 노조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한국경제가 재벌중심의 대기업생산체제에 의존하여왔다는 점이 자리하고 있다. 정부조차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취약한 노동자들을 방치하여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조가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에 눈멀어 노동자 ‘계급’내부의 단결조차 실현시키지 못한다는 비난에 대해서까지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상당부분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느 하청 노동자의 말은 이렇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사는 것 같다. 정규직은 1등 시민인 반면 우리는 2등 시민이다. 그런데 정규직들은 일제시대 때 일본놈들이 조선사람들에게 한 것보다 우리에게 더 못되게 하고 있다.”

 정규직조차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노동조합에게 그들의 관심을 공장 울타리 바깥으로 넓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공장담의 바깥에는 실업자와 비정규직, 중소영세업체 종사자,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존재하는가하면 여성, 환경, 평화, 통일, 인권, 복지운동들이 시민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거기에 노동운동의 내일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민주노총은 출범과 더불어 ‘사회개혁’을 자신의 지향으로 내세웠다.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전면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다면 소비자이자 시민으로서의 노동자의 삶에 대해 눈 감을 수는 없다.

 가령 노동자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옥죄는 교육비와 주거비만 하더라도 ‘사회개혁’없이 그 해결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개혁 없는 임금인상이란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일 뿐이다.

 노동조합 혼자만의 힘으로 사회개혁을 일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이제 작업장은 물론이거니와 사회 구석구석에서 지배적인 담론으로 굳어가고 있다. 노동조합이 동맹세력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이나 동맹을 위한 조건이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제 노조는 공장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의제를 스스로의 의제로 삼아야 한다. 이를 축으로 노동운동은 시민운동과 ‘물과 고기의 관계’로 만나야 한다.

 물론 문제는 남는다. 어떻게 조합원을 설득하여 그들의 의식을 공장밖으로 끌어낼 것인가? 시민단체와의 연대는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시킬 것인가?무엇을 매개로 시민단체와 만나며 이 경우 노동자 ‘계급’의 중심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이 진보적인 정치운동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

 다행스레 우리는 일찍부터 미약하나마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접점들을 확보하여 왔다. 비정규직과 관련하여서도 현재 100여개의 단체가 모여 ‘비정규노동법 개악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외국의 경험으로부터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선 급한 것은 노조부터 덕지덕지 낀 기득권의 업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제 발목은 자기이익에 담가둔 채 대의의 깃발을 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존 노동조합의 양보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것이 노동자의 연대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노조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고립을 회피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면 반드시 외면할 이유는 없다.

 단기적인 후퇴가 장기적인 전진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시야의 길고 짧음의 문제일 뿐이다. 오죽했으면 어떤 사람은 오늘날 노동운동을 두고 “멸망으로 가는 완행열차를 탄 채 졸고 있다”고 표현하였을까. 이 때 노동운동의 잠을 깨우는 것은 사회적 연대의식이다. 이러한 연대의식을 담는 최적의 그릇은 내부적으로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건설일 것이며, 외부적으로는 시민단체와의 만남일 것이다.

박태주(한국노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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