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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9월 이전 Q&A

인간해방론 운동의 기치를 내걸자.

킹옥황상제 | 2005-08-28 20:33:03

조회수 : 1,258

개량주의를 청산하자.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걸친 기간 동안 우리나라 노동운동 안에서는 \'노동해방\'이 그 지향목표로서 보편적으로 표방되었다. \'노동해방\'이 새겨진 깃발이 펄럭였다. 노동해방\'가가 널리 불려졌고,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구호가 널리 외쳐졌다. 질끈 동여맨 머리띠에도 \'노동해방\' 네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88년 11월 13일, 최초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흰 천에 손가락을 베어 피로써 쓴 노동해방 네 글자를 앞세우고 4만 명의 노동자 군대가 21개의 대오를 이루어 연세대 교정에서 여의도 광장까지 힘차게 행진했다.
물론 \'노동해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막연한 점이 있었다. 일부 이념적으로 급진적인 부분에서는 노동해방이란 곧 사회주의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반면 노동자 대중들은 대부분의 경우 초과착취와 무단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 말을 \'이해\'했다. 또 당면해서는 초과착취와 무단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서로 조금씩 달랐지만 노동해방이라는 단어 속에는 변혁을 향한 지향이 담겨져 있었다. 당면의 과제로든 근본적인 과제로든 노동자의 해방은 기존의 사회구조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를 혁파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또 그렇게 이루어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모두들 노동해방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이러한 진취적 기세는 90년대 초반 밖으로는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안으로는 군사독재로부터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치로의 이행--민주변혁을 향한 민중의 진출을 봉쇄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수동적인 개혁으로서, 권위주의 요소가 온존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통치형태의 변화--이 진행되면서 급격히 변화되었다. 이제 해방이나 변혁은 낡은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었다. 노동자 집회에서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사라졌고, 노동해방가가 불리지 않게 되었다. \'노동해방\'이라고 적힌 머리띠도 역시 사라졌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개혁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었다. 민주노총 추진위원회가 출범을 선언하던 94년 11월 노동자대회에서는 \'사회개혁\' 네 글자가 아로새겨진 현수막이 대회장을 장식했다. 이후 노동자들의 생활에서는 자동차가 필수품이 되고 한 동안 주식투자가 자랑거리가 되었다. 바야흐로 \'개량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량주의의 만개는 조만간 그 실효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우선 국내적으로 총자본은 개량을 제공할 의향이 없었다. 또한 세계적으로는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했음과 더불어 현실자본주의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축적위기에 처한 현실 자본주의는 돌파구를 찾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치닫고 있었고 이 파도는 97년 IMF 사태를 통해 이 땅의 노동자·민중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족쇄 풀린 초국적 금융자본이 추동하는 사유화(현대판 종획운동)와 유연화 초과착취 공세 속에서 자본의 양보와 타협을 끌어내어 개량을 만들어 가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져 갔다. 자본의 양보 대신에 노동이 내어주는 양보교섭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면서 개량주의 기세는 한풀 꺾이었다. 그러나 대안이 없으므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10여 년 전 개량주의가 노동해방을 청산했다면 이제 청산자를 청산해야 할 때가 되었다. 대안이 없다고 죽은 자식을 계속 품에 안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은 문제는 왜 그것을 땅에 묻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리고 그것을 땅에 묻은 후의 대안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지점을 곰곰이 성찰하는 일이다. 성찰하되 추상적인 논리로써만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세계적, 역사적 경험들을 널리 참조해서 그렇게 하는 일이다.
 개량주의로 안 되는 이유 세 가지 먼저 개량주의를 청산해야 할 이유를 짚어보자. 그 이유는, 첫째로 개량주의로는 현실적으로 개량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라는 개량주의에 대한 대안의 패러다임으로 출현했다. 케인즈주의가 일정하게 금융자본을 희생시키면서 분배 면에서 노자간에 타협을 성사시킴으로써(하지만 어디까지나 생산성 향상의 범위 안에서!) 자본관계 자체를 지속시키자는 축적 패러다임이었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주도 하에 생산자본을 통합시키고 노동에게 희생을 집중시키자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패러다임을 노동자 대중들은 \'고통분담\'을 입에 올리며 강요하는 \'고통전담\'으로서 뼈아프게 경험했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는 반대해야 할 패러다임으로 말하게 되었다. 문제는 대안이 무엇인가이다. 대안\' 말이다.
일각에서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멈추게 하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타협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일국적 수준에서 노동조합운동과 개량주의 정치운동을 결합시켜 추진했던 케인즈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가 세계화한 자본주의 현실에서 무력함을 드러내어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변화된 현실에 맞게 일국적 수준이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그것을 복원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국제 케인즈주의가 그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일 뿐 아니라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라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새로운, 그러나 실제로는 낡은, 사회적 타협은 세계적 범위에서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고하게 결집될 때에만 현실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에 비추어 세계 노동자들이 그 같은 개량을 쟁취하기 위해서 민족과 국적을 초월하여 하나로 강고하게 단결하여 가열차게 투쟁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전 세계적 계급투쟁은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실천을 요청하는데, 지난날 혁명지향의 의식으로도 넘어서기 쉽지 않았던 장애물인 민족국가를 개량지향의 의식으로 무장하고서 넘어서기란 어려운 일이다.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가 아니고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설사 노동자 국제연대가 어느 정도 강화된다고 해도 초국적 자본과 제국주의가 그 정도의 단결과 투쟁에 굴복하여 일방적 공격으로부터 양보와 타협으로 돌아설 리도 없다. 더구나 자본이 위기에 처해 있는 시대에, 그래서 무한전쟁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는 상황에서 개량주의 투쟁으로는 개량을 쟁취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민족주의가 금기처럼 간주되는 유럽에서 개량주의 노동운동이 아직껏 범 유럽연합 차원에서 위력적인 연대투쟁이나 사회적 타협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둘째, 개량주의의 성과물로 이야기되는 복지국가는 담론이나 대화의 산물이 아니라 수천만 명에 달하는 인간생명에 대한 대량살상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수행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결과물로서 출현했다는 점이다. 케인즈는 일찍이 1920년대에 \'자유방임의 종언\'을 고하며 \"(노동 측에) 다 내어주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진보적\' 주장은 20여 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모국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적 참화를 경과하고 나서, 그리고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을 향한 세계 노동자·민중의 혁명적 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됨으로써 자본주의가 체제전복의 위기에 직면하고 나서였던 것이다. 개량이 곧 개량주의의 성과물이 아닌 것이다.
셋째, 체제 내적인 개량은 매우 가역적이어서 굳게 믿을 것이 못된다는 점이다. 개량은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상당히 개선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내지 자본관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한 어떤 시기에 자본이 노동에 양보하여 상당한 개량이 이루어지더라도 자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그것을 역전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개량은 능히 개량의 철회로 역전된다. 자본에 포섭되어 개량주의에 안주하는 노동운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복지제도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다는 프랑스에서 노조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공공부문 연금제도 개악이 관철된 것이나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던 독일 금속노조가 임금인상 파업에서 패배하여 항복한 것을 보면 개량주의 노동운동의 한계를 실감할 수 있다. 이것은 복지국가의 탄생과 쇠퇴의 역사로부터 노동운동이 배워야 할 교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이다. 이 교훈을 무시하고 또다시 개량 획득을 운동의 지향목표로 삼자는 것은 소 잃고 나서도 외양간 고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다.
따라서 우리 노동운동은 하루빨리 개량주의라는 헛된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일체의 개량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 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초국적 및 국적자본을 망라한 총자본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공세 앞에서 노동자대중은 노자간에 타협적 관계만이라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금년 들어 자본의 비타협적 태도로 인해 우리의 동지들이 연이어 귀한 목숨을 바치고 있음에랴! 그러나 이 참담한 현실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자본에게서 양보와 타협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양보와 타협을 통한 개량에 더욱더 매달려야 하는 것, 자본관계가 영속하도록 굴종하는 대가로 개량을 얻어내는 것을 더욱더 확고하게 우리 운동의 지향목표로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참담한 현실을 통해서 현존의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그러한 개량이 기대될 수 없음과 더불어 그런 개량의 획득을 최고의 목표로 하는 개량주의가 노동자의 참된 희망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개량이 절실하다고 해서 개량주의가 절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해방을 기치로 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
그러면 다시 노동해방 깃발을 치켜들자는 것인가? 우리나라 노동운동에서 노동해방의 기치는 자기가 수행해야 할 나름의 역사적 임무를 다 했다. 노동해방의 기치는 노동자는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열망하는 계급이라는 것,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스스로가 이루어내는 일이라는 것, 모든 예속상태에 있는 인간들의 해방은 노동자의 해방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등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노동해방은 깃발은 당시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다. 노동운동 안에서는 물론이고 여타의 사회운동들로부터도 그러했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것이 상징하는 내용은 빛이 많이 바래었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모두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지점에서는 불충분했고 어떤 지점에서는 과도했고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을 경과하면서 자본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더욱 분명해졌다.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자본주의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민주화되고 있다는 나라에서 빈부격차가 급속히 악화되고 노조탄압이 더욱 심해진 현실이 그것을 생생하게 입증해 주었다. 최근 빈곤자살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의 경험이 가르쳐 준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유연화 초과착취는, 자본주의란 노동을 인간의 생산활동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생산수단들과 마찬가지로 생산자원의 소비로 파악하면서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정부 부서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을 달고 있다! 인간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관계라는 것, 노동의 결과물을 갈취할 뿐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생명활동이 발휘되지 못하게 통제하고 그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관계라는 것, 무한히 자기증식하는 가치인 죽은 노동이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산 노동을 지배하는 반 생명적 관계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겪어보면 볼수록 비인간적인 관계, 탐욕의 화신인 자본이 노동자의 인간성을 유린하는 지배-예속 관계이며 따라서 그 테두리 안에서는 원천적으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관계이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임금노동자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임금노동자가 되어 노동과정에 들어온다. 그러나 임금노동자가 되는 한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과정 안에서나 밖에서나 인간답게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은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최소한의 요구로 파악될 것이 아니라 자본에 대립하는 노동의 근본적인 요구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의 지향목표는 노동해방에 머무를 수 없다. 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와 무단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나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또는 평등세상 등으로 표현되는 것으로는 부적합하다. 그렇게 해서는 소유의 평등 내지 분배의 평등이 지상목표인 것처럼 혼동될 수 있다. 그것은 심하게는 소유가 평등하게 나누어진 자본주의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소유와 분배의 평등을 넘어 노동자가 생산자원이 아니라 고귀한 생명활동(그 가운데 필수적인 것이 생산활동이다!)을 하는 인간으로서 그 지위가 평가되는 것, 노동이 소비수단의 확보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강제된 노역이 아니라 인간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되는 것, 물질적 생산의 필요성이 존엄성을 가진 인간의 삶 전체를 압도하지 않게 되는 것(성장주의 또는 생산력주의의 극복!) 등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 같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건설로 나아가지 않으면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은 실현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해방은 이제 노동자의 근본적인 해방, 어떤 지배에도 예속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노동자의 해방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인간해방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지향목표는 유토피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 인간해방의 지향목표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로부터 얻어낸 교훈이기도 하다. 현실사회주의는 유토피아의 과잉에 의해 붕괴된 것이 아니라 그 결핍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는 또한 정보화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고 있는 비약적인 생산력 발전으로부터 상상하게 되는 실현 가능한 전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노동해방을 표방했던 지난날의 노동운동이 대중들을 인간적 해방을 지향하는 개인으로가 아니라 소유자적 개인으로 구성해 내는 데 머물렀던 데 대한 반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한편, 노동운동은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 지난날 노동해방이 내세워지던 시절에는 노동자계급이 특권화 되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자가 해방되면 성적, 인종적 등 인간에 대한 인간의 여타의 차별이나 예속관계들은 자연히 해결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사회운동 안에서 노동운동이 중심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인간해방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요청하는 것을 넘어서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상식에 속하게 되었지만, 계급적인 해방이 이뤄진다고 해서 성적, 인종적 해방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노동자계급은 그러한 차별이나 예속관계를 유지하는 데 본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여타의 예속관계들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지배와 긴밀하게 얽혀있는 만큼 노동자의 계급적 해방이 보편적 인간해방의 실현에 필수불가결하고 유력한 조건이 될 뿐이다.
반면에 노동자의 계급적 해방은 노동자계급이 인간의 보편적인 해방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 안고 투쟁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보편적 인간해방이 노동자의 해방에 불가결하고 유력한 조건인 것이다. 부르조아지조차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자기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보편적 해방자로 자임하고 역할했다. 민중을 형식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해방시키는 대신 계급적 지배라는 새로운 형태를 부과했지만 말이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전근대적인 지배형태들에 비해서 지배의 계급적 기반을 한층 더 넓혀 놓았다. 대중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부르조아지는 한줌의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차이를 근거로 끊임없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관점에 입각하지 않는 한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다. 노동자 계급 내부의 통일·단결조차 만들어 내기 어렵다.보편적 이해와 인간해방의 관점에 서지 않을 때 우선 능력에 따른 차이를 근거로 하는 차별과 분절화를 넘어서기 어렵다. 성적, 인종적, 민족적 등에 근거한 차별이나 예속으로 인한 분절화를 넘어서기는 더욱 어렵다. 임금노동자 계급이 아니지만 자본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데 따라 생산, 재생산되고 있는 각종의 예속상태들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각계각층 민중들을 자본의 지배를 극복하는 역사적 투쟁에 함께 하도록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도 노동운동의 지향목표는 노동해방이기보다 인간해방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긍정하지만 그것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회운동들에게 노동자 중심성을 받아들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해방의 투사로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 못할 때 노동운동은 아무리 쪽수가 많더라도 특수 이익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되고 자본이 내세우는 허구적인 보편성에 휘둘리게 된다. 사회적으로 고립 될 가능성을 지니게 되고 그러한 고립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자본의 논리에 투항하는 것, 국민과 함께 하는 것 속에서 찾으려 하게 된다.
노동운동이 인간해방을 지향목표로 해야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노동운동은 사회의 구조나 환경을 변혁하는 운동인 동시에 노동자 자신의 인간성을 변혁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의식에는 온갖 종류의 오물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항구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인 조건으로 작용한다. 자본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관계한다. 이는 자연을 황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사람의 인간성을 또한 파괴적으로 만든다. 이는 마치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병사들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새만금 갯벌 매립 반대를 위한 삼보일배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지점을 깨닫게 해 주고 있다. 자본은 또한 노동자 상호간을 더욱 경쟁적 관계로 몰아넣는다. 이에 따라 인간성은 더욱 사적 이기주의적으로 정향된다. 또한 자본이 노동을 분열시키기 위해 만들어 내거나 강화시키는 성적, 인종적 등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차별과 지배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비인간적인 지배와 차별을 당연시하게 훈육한다. 한쪽은 지배자적으로, 다른 한쪽은 노예적으로! 자본은 또한 사람들의 필요욕구 체계를 동물적 욕망의 체계로 이끈다.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해, 그 실현을 위해 동물적 욕망이 부채질되고 사람들의 필요욕구는 동물적인 욕망으로 왜곡된다. 또한 과정을 무시한 결과로서의 생산성이 최고의 기준이 되면서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적으로 되고 인간다운 도덕적, 미적 감성이 억압된다. 그 대신 기계적 무도덕과 무감각이 내면화한다.
이러한 인간성의 파괴와 왜곡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할수록 심화된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자기해방의 불가능성을 얘기하는 근거로 된다. 존 홀로웨이는 이를 두고 \"혁명의 절박성과 불가능성의 비극적 딜레마\"라고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는 아무리 그렇게 비인간화되도록 강요되고 길들여지더라도 그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어느 순간 황폐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질서 질곡\'으로서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떨쳐나선다.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우리는 이러한 저항을 감격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문제는 투쟁으로 떨쳐나서는 것이 충분한 해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쟁의 수위가 경제투쟁으로부터 정치투쟁으로 높아지는 것으로 충족되지도 않는다. 노동자의 인간해방을 위해 이것들은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노동운동은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가시적 성과물을 쟁취하는 것, 나아가 노자간의 계급적 역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투쟁하는 대중 자신의 주체성이 변혁되도록 해야만 한다. 예속된 삶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 먹고살기 위하여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생명활동 하는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 삶의 주인으로 되는 데 있어서 생산의 영역에서든 시민사회와 국가의 영역에서든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적 주체로 서고자 하는 것을 삶의 지향으로 내면화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노동자는 해방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변혁 투쟁이 진전되는 만큼 사람들은 사회구조와 환경을 변혁하는 투쟁에서 더욱 확고해 진다. 역으로 사회구조와 환경이 변혁되는 만큼 노동자의 자기변혁이 진전되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노동운동은 단지 환경과 구조를 변혁하는 투쟁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 주체성을 변혁하는 투쟁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인간해방을 지향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전투적 투쟁을 열심히 수행해 온 노동조합들 가운데 그 조합원들이 매우 개인 이기주의적이고 때로 물질주의적으로 속물화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노동운동은 이들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러한 운동에는 희망이 없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를 사적 이기주의적 개인으로부터 사회적·공동체적 개인으로 거듭나게 하고 물질화, 속물화된 인간으로부터 존엄성과 품격을 지닌 인간으로, 전면적으로 발전한 개인으로 변혁시키는 투쟁이어야 한다. 노동운동 안에서가 아니면 다른 어디에서 그러한 인간변혁을 이룬단 말인가? 그런 문제는 오로지 개인의 사적 영역이며 노동운동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는 관점은 노동운동을 노동력 상품의 가격을 올려 받는 활동에 제한시키고 그럼으로써 자본관계의 재생산에 필요한 한 계기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개량주의란 바로 그런 것을 재생산하는 노동운동이다. 미국식의 상생주의,실리주의 노동운동은 그 전형이다. 실리적 상생주의 노동운동은 그 아류이다. 하루빨리 그것들을 버려야만 한다.

  • 참 대단하다 글쓴 사람도 대단하고 이거 끝까지 읽는 사람도 대단하다
    그렇게 머리좋으면 국회로 가보세요
    조합원 | 05-08-28 22:11
  • 국회로가라고?
    노동조합에있는 그놈 않한다고한 그놈
    그놈 정치인 그 놈에게 하는말인가
    정치인 | 05-08-29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