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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노동해방연대 | 2006-02-28 08:00:42

조회수 : 1,595

양극화,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전면에 떠오른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 연설을 통해 양극화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그가 ‘폭로’한 한국의 양극화 실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소득 계층 간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의 이익률은 대기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월급은 대기업의
60%정도에 머물고 있고, 비정규직 임금도 정규직의 60% 수준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더구나 이 격차는 90년대부터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비정규직 비율이 급속하게 증가했고, 영세
자영업자의 형편도 나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일자리도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고소득자와 저소득자는 많이
늘어났고, 중간소득 계층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소비가 위축되고 내수시장이 줄어들면서 한국경제가 장기적인
침체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극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노무현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걸려 있다. 노무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기업 노동조합의 양보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경제계도 “때로는 과감하게
양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이
대타협을 이루어야 하여, 이 정도의 “책임 있게 생각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연설이 방송을 통해 나간 뒤, 자본가계급 내 극우파를 대표하는
한나라당과 각종 자본가 신문들은 즉각 발끈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가 자본가들에 대해서도 경우에 따라 양보할 것을 주문한 데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2월 3일, 당 정책성명을 발표하면서 한나라당은
이렇게 주장했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 기업규제 완화,
반기업정서 해소, 노동의 유연성 확보, 작은 정부 구현 등을 통해 경제
활력을 증진시켜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첩경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대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더욱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빈부격차 해소와 일자리 창출의 필요성 자체는 부인하지
못했다. 상황 자체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보건사회연구원은 한국의 빈부격차 정도에 대해 ‘저소득층’에서
‘고소득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의식조사를 벌이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63.5%의 응답자는 우리나라의 빈부격차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고 말했으며, 29.5%는 약간 심각하다고 답했다.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빈부격차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중이
93%나 되었다. 반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거나 전혀 심각하지 않다고 말한
응답자는 각각 0.8%, 0.1%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한국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경향에 대해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채
안 되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중고등학생 중 40%
이상이 자본주의로부터 ‘빈부격차’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악독한 자본가들이라도 노골적으로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옹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까지도 겉으로는 빈부격차
축소가 필요하다고 지껄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말뿐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든 한나라당이든 양극화 문제 해결과 일자리 창출
자체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그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양극화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것인가에 이르면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가령 노무현은
“양극화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경제위기다.”라고 한다. 이것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불러들인 IMF 위기가 양극화 심화의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열린우리당 이목희의 주장처럼 책임이 한나라당
세력에게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는 이에 뒤질세라 “노무현 정부 3년간의 경기침체가 주범”이라며
받아쳤다. 경제학자 출신이라고 알려진 한나라당 윤건영 의원은 더 나아가
“세계경제가 호황인데 우리만 양극화가 심화한 데는 참여정부 3년간의
‘저성장’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경제가 호황인데
우리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대목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장의 의미는 분명하다. 저성장이 원인이고, 그 원인을 만든
이는 노무현 정부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그렇다고 현 정부의 상황 진단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지배계급 내의 여당과 야당이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경쟁자를 흠집 내기 위해 벌이는
‘진흙탕 개싸움’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진흙탕 개싸움을 비롯한 모든 싸움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싸움 자체에 정신을 팔면
자기 갈 길을 잃어버린다. 지금 노동자계급의 처지가 그렇다. 양극화
문제를 둘러싼 지배계급 여당 대 야당의 주도권 다툼이 전면에 떠오르고,
특히 다툼의 초점이 ‘세금논쟁’으로 흘러감에 따라 문제의 본질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다. 심각해지고 있는 양극화의 결정적 원인을 열린우리당
세력의 실책 내지 한나라당 세력의 실책으로 몰아가려는 저 논쟁은
완전한 속임수다. 게다가 두 자본가 정당들이 공유하고 있는 점이 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축적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속임수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노동자들은 진흙탕 개싸움에서 어느 한 쪽 개가 이기기를 바라거나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무기력한 구경꾼이 될 것이다.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노무현 정부가 퍼뜨린 주장에 이끌리고 있다.
정부는 비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고 고용이 안정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애썼다. 이것은 노동자계급
분할과 함께 폭발 직전인 최하층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돌리기 위한 기만책이다. 그
결과 많은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암암리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퍼뜨리는 ‘성장론’
앞에서 무력한 상태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자기 회사와 한국자본주의의 번영을 위해 충실하게
협력해야만 한다는 정서가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조직된
노동운동 전반이 조합주의 경향으로 더욱 강하게 이끌리도록 유도하는
배경이 된다.
  그 결과 노동자계급 내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가 조장하는 기만을 넘어설 수 없다면 노동자들은 결코 분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요구에 복종하는 조합주의적 한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부르주아 정당들이 들이미는 기만적인 미끼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사회 양극화의 근본 원인을 분명히 짚어야만 한다.

양극화란 무엇이며,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양극화의 원인에 대한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진단은 우물 안
개구리 식이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 때문에 그렇다거나, 한나라당의
과거인 신한국당 때문이라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 때문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부르주아
파벌들 간의 정략적 다툼의 표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특정한 자본가
정당의 정책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부추기거나 조금 완화하는
것은 아마도 약간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약간’ 그 이상은 절대
아니다. 양극화는 자본주의 자체의 논리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자본가
정당들이 자본주의를 없앨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자본가
정당도 양극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필연적인 속성상 양극화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윤을 얻는지 살펴보면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자본가들의 이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임금이 체불되거나,
또는 이른바 ‘정당한 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혀 임금체불이 없고, 심지어는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고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그 비밀은 간단하다. 임금으로 지불되는 만큼의 노동시간이 지난 뒤에도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관리 하에 노동을 지속한다. 이 초과노동에
대해서는 임금이 주어지지 않으며, 순전히 자본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이것이 자본가들의 이윤의 원천이다. 연봉제나 일체의 수당
등은 이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전부에 대해 자본가들이 임금을 지불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라. 그렇게 된다면 자본가들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할 것이며, 당연하게도 회사를 운영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즉 돈벌이를 위해 기업을 운영한다.
‘경영’이라는 고상한 개념은 사실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쥐어짤 수 있을 것인지 머리를 굴리는 자본가들의 의식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가절감’이라는 자본가들의 구호를
여러 작업장에서 흔히 듣게 된다. 그 구호는 노동자에게 지출되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발악을 표현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비정규직이 확산된다.
  더 나아가 현장에는 거듭 새로운 작업장비와 생산방식이 도입된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도입하는 이 신기술들은 결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더욱 악화한다. 그래서 자본가들의 돈주머니는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반면, 노동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는 나날이
고갈되어 간다. 도처에서 사망에 이르는 산업재해와 직업병이 속출한다.
명목상의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노동자들의 처지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명목상의 임금인상이란 노동자들이 생산해낸 거대한 부에
비하면, 거기에서 자본가들이 가져가는 몫에 비하면, 그리고 항상
임금인상 수준을 뛰어넘어 버리는 물가인상과 연관지어 본다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과거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더라도 사실상
자본가들이 거두어들이는 몫과 비교한다면 과거보다 더 빈곤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경쟁 속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자본가는
몰락하여 다른 자본가에게 잡아먹힌다. 소수의 대자본가가 다수의
중소자본가들을 수탈한다. 이윤을 보전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소자본가들은 더욱더 악랄하게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한다.
중소자본가에게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는 대자본가에게 직접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한층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다. 이것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생활수준을 전반적으로 하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자본가적 경쟁 속에서 일부 기업들이 몰락함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일정 부분은 늘 실업노동자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자본가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실업노동자집단 즉 산업예비군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상 시기에 실업노동자는 현업노동자의 임금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자본가에게 이용된다. 또한 산업이 호황기로 넘어갔을 때
자본가들은 이들을 고용함으로써, 임금의 급상승을 막으면서 생산을
팽창시킬 수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자본가들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노동자들은 희생되어야만 한다. 산업이 번창한다면 노동자들이 손에 쥐는
임금명세서의 숫자는 확실히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기적이지
지속적이지 않으며, 물가상승분에 의해 잠식당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가져가는 이윤에 비한다면 항상 상대적으로 작은 비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체제에서 노동자들이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은 ‘생활의 불안정성’과 ‘상대적 빈곤’(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부의 격차의 증대)일 따름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 먹혀야 한다. 호황기를 대비하여 일부
노동자들은 실업자로 남아 있어야만 하고, 공황기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자로 굴러 떨어진다. 그런 방식으로만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그런 방식으로만 자본주의는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 그래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자본가체제의 양극화 경향을 요약했다. “한 쪽
끝에서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맞은 편 끝에서의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무지, 야만화,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과정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것은 단지 노무현 집권
3년간의 침체 때문만도 아니고, 과거 신한국당의 정책 때문만도 아니고,
박정희의 군사독재 때문만도 아니다. 저들은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자신을 용의자 선상에서 빼내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모든 자본가들,
자본가 정당들, 그들이 구성하는 자본가체제 전체가 범인이다. 박정희
시대의 이른바 고도성장은 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피를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노동자들을 가축처럼 부려먹으면서 자본가들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따먹었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빛나는 자본가 왕국을
위하여 노동자들은 ‘산업전사’가 되어 죽음으로 봉사해야 했다. 그
이후 노동자들의 처지는 외관상 과거에 비해 개선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대가 살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빈부격차가 해소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더욱 불안정하고, 미래의 안정성을 말할 수 없다는 공포감을
피력한다. ‘IMF 위기’가 한국을 덮쳤을 때에도 자본가체제는
노동자들을 가장 먼저 사지로 내몰았다. 무수히 많은 현업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노동자로 전락했다. 그중 일부는 가망 없는 노숙자
처지로까지 내몰렸다. 자본가들의 회생을 위해서 노동자들이 희생해야
했다. 이 과정을 간단히 말해서 ‘양극화’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개혁의 기수를 자처하는 노무현 집권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친노동자정부’니 ‘좌파정부’니 하는 터무니없는 수식어가
극우세력에 의해 붙여지기도 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정확히 한국
자본가계급 전체의 이해관계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대변하고자 하는
‘친자본가정부’이자 ‘우익정부’다. 집요하게 노동법 개악을
밀어붙이려 하고, 노동자대중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려고
시도하는 장면들에서 현 정부의 실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정부로부터 양극화 문제 해결을 기대한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현 정부의 경쟁자인 한나라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덜
어리석을 것인가? 한나라당 및 이 당을 지지하는 신문들, 이론가들의
주장은 이미 확인했다. 그들은 더 많은 성장위주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법 개악을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본가들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라는 것은 이들이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는 권리를 더 많이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노동자들을 더욱더
강력하게 짓밟고 착취할 수 있어야만 자본가들의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성장을 이루어내야 그것을
기반으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성장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여러
세대가 피의 강물 속에서 익사해야만 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이루어지는 성장은 양극화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격화시킬
것이다. 그들이 결코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있다. 양극화는 성장의
침체기만이 아니라 고양기에도 거침없이 확대되어 왔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이다. 물론 상황이 객관적으로 그렇더라도, 그리고 이러한 진리가
앞으로 거듭 재확인되더라도 그들의 주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양극화의 완화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이윤
확대, 즉 착취 강화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자본가적 기준에서 보더라도 이들의 주장은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본가의 무한한 자유’다. 그 점에서
국가별 경제자유지수에 관한 자료를 보는 것은 유익하다. 아래 표에
의하면 한국의 경제자유지수는 38위로서, 35위에 있는 일본과 큰 차이가
없다. 1위는 홍콩, 2위는 싱가폴, 3위는 뉴질랜드, 4위는 미국과
아일랜드가 차지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무한한 자유를 외치는 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홍콩, 싱가폴, 뉴질랜드가 최고의 성장을 달성했을 것이고,
이들 나라에서는 빈부격차가 결코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홍콩의 성장률은
계속 하락해왔으며, 1998년에는 마이너스성장(-5.3%)을 기록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경제자유지수 1위인 홍콩에서 양극화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홍콩의 상위 20% 인구가 전체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70%가 7평 이하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결국 자본가들의 자유를 확대하면 경제성장과 빈부격차 해소가
가능하다는 저들의 주장은 한낱 착취강화 야욕을 감추기 위한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대중의 상당수는 이러한 지배계급의 논리,
자본가체제의 논리 앞에서 무기력하게 포섭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이해로 무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또한 자본가체제를 뛰어넘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면
결국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부분에서 답을 찾으려 애쓸 수밖에 없고,
자본가들의 논리에 말려들어갈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들이 양보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 자본가들의 자발적 기부문화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주장, 노동자들이 세금을 더 내서라도 사회안전망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 심지어는 우선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노동자들
전체가 자본가들에게 협력해야만 한다는 주장 따위가 횡행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가들의 주장에 절대 기만당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현재 한국의 지배계급 전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이 객관적 상황으로부터 왜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치부인 양극화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양극화 문제가 표면에 떠오른 까닭

양극화 문제, 부익부 빈익빈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달가운 일이 아니다. 자본가체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문제에 대해서 노무현 정부는 거의 호들갑에 가까운 태도로
떠들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휘청거렸던 1980년대 초반을 제외한다면,
한국자본주의는 줄곧 고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80년대 중반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의 3저 현상을 기반으로,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3저 호황을 누렸다. 80년대 하반기에는 연 경제성장률이
10%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한국의 대자본가들은 비약적인 자본축적에
성공하면서 국내에서 소화할 수 없는 과잉자본을 처분하기 위해 해외로의
‘자본수출’에 나서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아류(亞流) 제국주의로
도약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도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세계자본주의의 좁아지는
시장과 격화되는 경쟁이 이 도약의 한계를 설정했다. 해외 공장들에 쏟아
부은 막대한 투자분은 과잉자본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특히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갈수록 그
체제의 기생성과 부패성은 심화된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불확실한 생산적
해외투자 앞에서 과잉자본의 상당 부분을 부동산투기와 재테크 등
비생산적 부분에 쏟아 부으면서 도박에 빠져들었다.
  이들 앞에는 검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97년 국제적 금융위기가
그것이다. 오만방자했던 한국의 자본가들은 현란하게 돌아가는
‘세계자본주의 카지노’에서 한낱 아마추어에 불과했음을 배워야 했다.
위기가 그들을 덮쳤다. 더욱이 이 위기는 여전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본가들을 더욱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70년대 오일쇼크 수준은 아니지만 고유가가 장기화하면서 여러 기업들이
타격을 받고 있다. 유가 인상에 따라 원자재 가격도 덩달아 오르고 있다.
국제적으로 금리도 상승하고 있으며(금리가 올라가면 성장률이 둔화되고
소비가 위축되며 그 결과 한국 상품의 수출이 줄어든다), 원화가치가
상승하고 환율이 떨어지면서 특히 수출 위주로 구성된 한국산업의
경쟁력은 심각한 위협에 처하고 있다.
  이 상황을 반영해서 현대차그룹, 삼성전자, 엘지전자, 포스코 등 여러
기업 자본가들이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현대-기아자동차의 경우 환율이
10원 떨어질 때마다 대략 2천억 원 가량의 매출손실을 낳는다고 한다.
한국의 일부 대기업들, 특히 자동차산업 대공장들이 예외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호황은 토대가 매우 허약하고 언제
꺼져버릴지 모르는 거품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대자본가들이 비상경영을 선포한 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주로 절대적 원가절감을 중심으로 한 초긴축경영, 인원감축,
구조조정 등으로 수렴되고 있다. 자본가들이 늘 그래왔듯이 자본주의의
위기는 결국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처지를 더한층 열악하게 끌어내릴 것이고,
빈부격차를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내수시장이
더욱더 위축되면서 경기가 악화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중되는
빈부격차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예측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으로
체제를 겨누게 될 것이다.
  자본가계급 전체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정부가 이 상황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날이 격화되는 세계경제전쟁, 끝없이 추락하는
한국자본주의의 현실 앞에서 개별 자본가들은 자제력을 잃으며 날카로운
착취자의 발톱을 드러내려 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나라의
계급투쟁을 첨예하게 발전시킬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최고 지도부인
정부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노무현 정부는 자본가들과
경쟁 정당들을 향해 “책임 있게 생각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자세를
요청하면서, 양극화 문제를 완화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즉 현
정부가 양극화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위기의
적색등’을 보고 있음을, 다시 말해 한국자본주의가 점차 격화되는
계급투쟁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창이다.
  의식적인 자본가계급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계급투쟁의 고양을
봉쇄하고 위기를 진압하려 애쓴다. 1920년 이탈리아에서는 거대한
공장점거운동(공장평의회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바로 몇 해 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의 소비에트와 유사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분노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주먹을 휘두르며 정부를 향해
즉각 군대를 투입하라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자였던 지올리티 수상은 군대를 투입하는 대신 느긋하게
시간을 투입했다. 한편으로는 개별 자본가들을 자제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에게 ‘산업통제’를 미끼로 던졌다. 조합주의
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이탈리아의 노동조합 및 사회당
지도부들은 이 미끼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공장평의회운동은 고립되었다.
이탈리아 지배계급은 성공적으로 노동자투쟁을 제압하면서 계급투쟁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1968년 프랑스의 드골 역시 같은 전술을 구사했다.
총파업에 나선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투쟁에 의해 거의 쫓겨날 뻔 했던
드골은 ‘(경영)참여’ 구호를 내세우며 효과적으로 노동운동 지도부를
무력화시켰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철폐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이들을 모방하고 싶어한다. 정부 명칭조차
‘참여정부’라고 붙여놓았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서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며 계급타협의 길로 인도하려 한다. 때늦지 않게
타협체제를 구축하지 않는다면 개별 자본가들의 극렬한 공격이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을 더 크게 불러올 것이고, 노동자들의 저항이
체제의 테두리를 넘어설 가능성도 더욱 커질 것이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한편으로는 조직된 노동운동의 주력부대인 대기업 노동조합들에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자본주의의 척추를 형성하는 대자본가들에게 계속
압박을 넣으며 ‘양보와 결단’을 요구한다. 양극화 문제가 계급투쟁의
격화가 아닌 계급협조의 방향으로 연결되도록 사전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장기적으로 볼 때 자본가체제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수적으로 동원되는 장치가 있다. ‘절박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과 미국의 자본가 정부가
우선적으로 뛰어든 작업 역시 그런 것이었다. 전쟁이 다가왔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무너질 것이다, 여러분들
모두가 파시스트 독재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자유’를
지켜야만 한다, 등등의 선동을 통해 노동조합 지도부를 매수하고
노동자계급 다수를 포섭하여 체제의 노예로 확실하게 붙들어
매어놓음으로써 그들은 자신감 있게 경쟁 자본가 국가들(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다툼을 벌일 수 있었다. 이 매수는 맨 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군수품 생산을 통한 특별이윤과 전후 호황의 떡고물을
약속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타협체제로 유도해나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2~30년간 지속된 사상 최대의 호황은 계급투쟁을 잠재우는
객관적 토대가 되었다. 물론 이런 타협을 통해 이익을 얻은 자들은 주로
노조관료들이나 독점대기업의 소수 노동귀족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노무현 정부의 딜레마가 있다. 그는 과거 영국과
미국의 자본가 정부들이 취했던 정책을 적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책을
수입할 수는 있지만, 그 정책의 성공을 보장했던 객관적 조건들까지
수입할 수는 없다. 2006년 한국은 2차 대전 시기의 영국과 미국이
아니다. 더 이상 호황을 기대할 수 없다. 호황은커녕 비관적인
경제위기의 전망만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 대중을 향해 떡고물을 약속할
수는 있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자본주의의 축적
자체가 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량의
빵부스러기는커녕 그들은 노동자들을 더 가혹하게 수탈해야만 한다.
  노무현이 아니라 박근혜가 집권하더라도 이 객관적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들이 아니라 다른 누가 집권하더라도 그렇다. 자본가체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한 이 객관적 현실로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 정부는 더욱더 집요하게 계급타협을 추구하지만,
항상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좌충우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체계적으로
노동자대중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 공작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을 봉쇄하는 데서 잠시 일정하게 성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마취의 효과는 아주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열악한 처지라는 몽둥이가
노동자대중의 머리를 흔들어 깨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감안할 때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어떤 식으로든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환상, 최소한
한나라당의 박근혜식 성장정책보다는 노무현 정부의 입장이 더 낫다는
믿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에 문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주장, 이
모든 헛된 기대와 판단들은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 및 객관적인 사실들과
조금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임금인상과 고용보장에 자신의 관심사를
제한하는 조합주의적 태도는 이러한 자본가계급의 포섭작업 앞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초보적인 단결과 투쟁을
이끌어내는 첫걸음으로서 유용한 진지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사코 그
첫걸음에만 머무르려 하는 조합주의는 노동자들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조합주의는 노무현 정부가 양극화 문제 해결이랍시고
제기하는 가증스런 대안들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실어줄
것이다. 노동자의 대안은 자본주의 저 너머에, 그리고 조합주의 저 너머에
있다.

탈출구는 어디에?

양극화 현상이란 특정 정부, 정당의 실책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미 다루었다. 그것은 자본가체제의 본질적 구성요소 중 하나다.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우리는 양극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모든 사례를 포괄하려면 별도의 소책자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양극화가 자본가체제의 본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
자본가체제를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만이 정답이다. 자본가체제를 넘어서야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비현실적인
전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체제 내에서
노동자들이 영구적인 안정과 삶의 개선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비현실적인 전망이다. 이것은 마치
봉건시대의 머슴들이 봉건체제를 타파하지 않고서도 신분제적 억압을
완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똑같이 비현실적인 전망이다. 비록 그것의
완전한 철폐가 수백 년 후에 일어났을지라도, “왕의 씨와 머슴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 신분제도 철폐!”를 주장한 혁명적 머슴들의 입장만이
유일하게 옳았다.
  자본가들의 정부가, 또는 다른 자본가 정당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노동자들 내에서 복종의 심리만을 부추길 뿐이다. 그것은
가장 해악적인 종류의 환상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며 비관에 잠길 것인가? 그렇게 한다면 아마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영원한 노리갯감이 될 것이다. 영원한
희생양으로 자본의 제단에 바쳐질 것이다. 그 핏물을 받아 마시며 생명을
유지하는 자본가들만의 천년왕국이 이어질 것이다. 노동의 고통에 짓눌린
채 노동자들은 야만적 체제의 발톱 아래 신음해야 할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이 노동자계급 앞에 놓여 있다 : 노동해방인가 야만인가! 이
갈림길을 명확히 직시해야만 우리는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다수의 노동자대중은 이 갈림길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해방이 유일한 대안임을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해방이 대안’이라는 외침만으로 대중을 이끌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노동해방이라는 대안을 움켜쥔 소수의 투사들은
노동자대중이 자신의 투쟁 경험을 통해 노동해방을 향한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대중이 스스로
노동해방이라는 대안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걸음씩 객관적인
주춧돌을 놓아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노동해방’은 한낱 광야의 외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해방 투사들은 자본가들의 지배와 착취에 맞선 모든 노동자투쟁의
최선두에서 함께 싸워야만 한다.
  양극화를 근본에서 폐지할 수 있는 투쟁, 노동해방을 향한 투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체제의 양극화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구체적인 영역들이 곧 투쟁의 무대가 된다.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양극화는 비정규직 증대로 나타난다. 임금격차로 나타난다. 고용불안으로
나타난다. 실업률의 증대로 나타난다. 어마어마한 물가상승으로 나타난다.
개인파산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투쟁들이 노동해방을 향한 투쟁의
출발점이다. 노동해방 투사들은 이 투쟁들 속에서 다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노동자들 앞에 일관되게 다음을 제기한다
: 자본가체제는 이 문제들을 절대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최상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미봉책만이 제시될 수 있을 뿐이며, 장기적으로
본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악화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담하게 노동해방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본가체제가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
‘비정규직 완전철폐’는 추상적인 논리로는 실현 가능하지만, 세계경제
속에서 한국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구체적인 조건에 비추어본다면
실제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최소한 현재의 자본주의의 객관적
상황에서는,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세력관계 하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그리고 쇠퇴기의 세계자본주의, 그리고 그 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한국자본주의에서는 아마도 영원히 실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완전철폐 구호는 노조관료들, 조합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그들의 눈에는 이 구호가 너무나 비타협적인
구호이고,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려할 때 실현 불가능한 황당한 구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해방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완전히 실현
가능한 구호이다. 단, 노동해방을 향해 진군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러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해방을 향해 평범한 노동자들을
안내하는 구호가 된다. 노조관료들이나 조합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뛰어넘지 않으려 하는 반면, 노동해방 투사들은 그것을 뛰어넘으려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비롯된다.
  이런 노동해방 투사들의 당면 요구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정서에는 잘
들어맞는다. 이러한 투쟁을 최대치까지 밀어감으로써 노동자들은
자본가체제의 경계선에 몸을 부딪치게 된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이 체제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진실을 보게 되는 그 순간이 곧
노동해방 투사들의 대안이 대규모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이다.
조합주의자들의 대안이 무기력하게 무너질 때 우리는 노동해방 대안의
불가피성을 폭넓게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조합주의자들과 달리 노동해방 투사들은
자본주의를 넘어서야만 성과를 쟁취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진실을 말할 수
있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투쟁의
최상의 성과를 발견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과감하고 대담하고 근본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당장의
투쟁에서도 최상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체제를 내놓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본가들은 어느 정도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승리를 통해 확보한 자신감과 투쟁력을
발판으로 더 멀리 전진함으로써 노동해방에 더 가깝게 다가설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이 진실로 노동자대중의 계급적 자각과 단결의 계기가 될
수 있으려면, 일상 시기에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대중적 선동과 선전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중은 과연 누가 일관되게 진실을 말하고
있었는지 검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우리의 진지를 쟁취해가야 한다. 그
속에서 노동해방을 향한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켜가야 한다.
양극화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이 시기는 이러한 대중적 정치활동의
기회를 도처에서 제공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제대로 붙잡을 수
없다면, 조합주의 운동을 넘어설 수 없다면, 결국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노동자대중을 낚아채갈 것이다. 설사 낚아채지는
못할지라도 노동자대중은 진군의 길을 찾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버리면서
자본주의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진지한 노동해방
투사라면 노동자대중에게 노동해방 정치를 제공하는 데에서 조금의
게으름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사력을 다해 이 투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양극화 문제는 우리 앞에 열린 또 하나의 전투 공간이다! 우리는 이
공간을 환영하며, 이것이 우리가 노무현 정부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

이메일 nhaebang@jinbo.net
홈페이지 haebang.jinbo.net(주소창에서 “노동해방”을 치면 바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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