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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이야기

자유를 거세당한 자

펌 | 2026-06-23 10:56:12

조회수 : 316

입력 2026.06.23 06:30 

▲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조회 때 동의서 받았냐고요?” 할 말 많은 위원장의 말을 자르고 나는 물었다. 그가 어떤 말을 쏟아낼지 너무도 잘 알기에 그의 말을 중간에 끊고서 나는 내가 묻고자 하는 걸 말해야 했다. 다음 주에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될 재판 준비를 위해서 연락했던 것인데, 간단히 몇 가지를 확인하려고 묻는 내게 그는 그동안 노동자로서 쌓였던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회사가 만들어 온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해서 서명했을 뿐이다, 동의서 내용에 관해서는 교육이나 설명도 받지 않았다, 지점장·부서장이 동의하라고 해서 압박을 느껴 서명했다…. 그의 억울함은 끝이 없었고, 나는 말을 잘라야만 했다.

“회사가 ‘하라’ 해서 동의서에 서명한 것이라고, 억울하다고 판사에게 주장한다고 해서 법원이 우리 노동자 편을 들어주지 않아요, 혹시 지점장·부서장이 동의서를 들고 다니면서 서명받았나요? 직원들을 한자리에 불러 하지 않고?” 어떻게든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에 관한 법리 위반을 주장하기 위한 거리를 찾아내고자 나는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400곳이 넘는 지점, 부서가 동일한 방식으로 동의서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는 위원장의 말을 나는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태에서 동의하도록 했는지, 그 직원수가 얼마나 되는지 등을 당장 파악해 말하기 어렵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날 나는 기대했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억울함과 답답함을 토로하는 말속에서 무엇이라도 찾으려고 하다가 통화를 마쳐야 했다.

2. 임금피크제 사건이다. 임금피크제, 즉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있는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제도가 위법·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삭감된 임금 등을 비롯해서 지급받지 못한 금품을 회사에 청구한 사건이다. 합리적 이유 없는 연령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을 위반했다는 것 외에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거치도록 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에 관한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것도 임금피크제가 위법·무효라는 법적 근거로 내세워 소장을 제출했다. 고령자고용법 위반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근로기준법 위반은 인정될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소를 제기했던 것인데, 최근 피고 회사가 90%가 넘는 근로자가 임금피크제 도입에 동의했다며 근로기준법상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지점·부서별로 노동자들이 서명한 동의서까지 피고 증거로 제출했다. 졸지에 기대는 크게 꺾였고, 나는 동의의 빈틈을 찾아야 했다. 근로기준법은 과반수노조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근로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 불이익하게 변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여기서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는 집단적 회의 방식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법원은 판결해 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파악하겠다고 전화해서 위원장의 말을 토막내면서까지 묻고 물었던 것이다. 지점·부서별로 모여서 한 것이냐고.

3. 이 나라에서 취업규칙 제도는 노동자의 자유를 거세하는 제도다. 취업규칙은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복무규율에 관한 준칙을 말하는데, 이 나라의 법은 사용자가 작성·변경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의 취업규칙에 관한 장이 그것이다. 근로기준법은 임금·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에 관한 사항에 관해 “상시 10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용자”에게 취업규칙으로 작성하도록 하고, 그 작성 및 변경에 관해서는 과반수노조나 과반수노조가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을 듣고,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그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93조·94조 참조). 이렇게 법이 사용자에게 임금 등 근로조건에 관한 사항을 취업규칙으로 작성·변경하도록 규정하면서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자유를 거세당하고 말았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법률관계는 근로계약관계이고,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계약관계처럼 당사자 간 합의로 계약의 조건 내지 내용이 정해져야 한다. 근대 이후 법은 국가권력관계가 아닌 사적 법률관계는 사적 자치의 원칙이 지배하고 그중 가장 중요한 계약관계에 있어서는 당사자 사이에 자유로운 합의로 정하게 되는 계약 자유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다. 사적 자치의 원칙, 계약 자유의 원칙이 부정된다면 이 세상에서 사적 법률관계에서 자유는 없다. 계약·법률관계를 결정하는 자의 자유만 존재하고, 그 계약·법률관계에 따라야 하는 자에게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나라의 법은 취업규칙 제도를 통해서 사용자가 임금 등 근로계약의 주요 내용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취업규칙이 노동자와 사용자 간 근로계약관계를 규율하지 않는 것이라면, 임금 등 근로조건은 어디까지나 당사자 간 합의로 체결한 근로계약과 노사 간 체결한 단체협약에서 정해지도록 하고 있다면, 문제 되지 않겠지만, 아니다. 이 나라에서 취업규칙은 근로계약과 단체협약 위에 있다. 근로계약은 채용될 때 작성하면 그만이고 그것도 자세한 근로조건에 관해서는 회사 제 규정, 즉 취업규칙에 따르도록 해서 이 나라 노동자들의 근로계약관계는 취업규칙이 근로계약을 배제하고서 지배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있어서 단체협약을 체결한 사업장에서도 취업규칙은 실질적으로 단체협약 위에 군림한다. 이 나라에서 노조가 체결한 단체협약을 읽어보면 회사의 제 규정, 즉 취업규칙보다 우월하게 규정해서 취업규칙 위에 군림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자세한 사항은 취업규칙에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임금피크제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사용자는 임금피크제에 관한 회사 제 규정을 마련해서 과반수노조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추진하는 방식, 즉 취업규칙을 통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시행한다. 노동자의 기존 임금을 삭감하는 것임에도 근로계약상 임금 사항을 임금피크제 기준으로 삭감하는 노동자와의 합의도 없고, 그 노동자가 조합원으로 가입돼 있는 노조와의 단체협약 체결도 없다.

4. 이 나라에서 취업규칙 제도가 어떻게 노동자의 자유를 거세하고 있는가. 임금피크제의 도입·시행을 보면 알 수 있다. 2016년 60세 정년연장에 관한 고령자고용법 시행을 앞두고 사업장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고 난리였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임금이 삭감되는 제도를 받아들일 리 없으니 사용자들은 더 난리였다. 노동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자신의 임금이 삭감되는 것을 받겠느냐, 아니면 받지 않겠느냐를 결정하라고 했다면 당연히 후자였다. 당시는 2016년부터 근로자 정년은 60세로 간주되는 법적 정년제도가 시행되는 상태였고, 그러니 정년을 60세로 연장한다고 해서 노동자가 임금 삭감을 받아들일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업장들에서는 정년 60세로 하면서 임금피크제가 도입·시행됐다. 노동자와 개별적으로 합의해서 근로계약에 임금피크제를 포함시킨 것은 아니었다. 임금피크제에 관해서 사용자가 노동자들과 개별적으로 합의해서 근로계약을 새로 체결하거나 갱신하는 사례는 보지 못했다. 만약 노동자들과 개별적으로 합의해서 임금피크제를 반영하는 근로계약의 체결 내지 갱신을 시도했다면, 일부 노동자들은 끝까지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고, 임금피크제는 그들에게 적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사용자들은 취업규칙을 통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시행했던 것이다. 과반수노조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로 노동자에게 불리한 제도를 도입·시행할 수 있도록 한 취업규칙 제도는 이럴 때 사용하라고 보장해 준 것이라 보고 이 나라 사용자들은 앞다퉈 임금피크제 도입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과반수노조는 그 취업규칙, 즉 임금피크제의 도입에 동의를 해줬고, 과반수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는 근로자 과반수가 동의를 해줬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자유를 거세당한 이 나라 노동자는 정년을 앞두고 임금이 삭감되게 됐다.

일하는 자가 모두 노동자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가 거세된 채 일하는 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주인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야 했던 노예가 대표적이다. 근대 이후 세상의 법은 다른 사람들처럼 노동자에게도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와 합의해서 임금 등 근로조건, 즉 근로계약의 내용을 정하도록 보장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는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임금피크제가 도입·시행된 사례를 통해서 나는 이 나라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유를 거세하는 취업규칙 제도를 두고서는 이 나라에서 근로계약관계 질서는 정당할 수 없다. 과반수노조가, 근로자 과반수가 동의했다고 해서 적법·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자의 자유 박탈을 외면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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