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gallery/Cup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young/brod.js></script> 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육군소장

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육군소장 (팔장을 끼고있는 사령관 님)
백 비
우리 조상들은 죽어서도 불의에 저항했다.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정권 을 잡자 부제학으로 있던 조상치는 영천으로 낙향, 두문불출하고 종신토록 왕궁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살았다. 죽기전에 다듬지 않은 허술한 돌멩이로 자신의 무덤앞에 세울 비석 하나를 만들어 놓았는데 「노산조 포인 조상치지묘」라 새겨져 있었을 뿐이다.
노산조라 함은 옛 임금의 신하이지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나타냄이고 포인이라고 했음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뜻이니 죽어서까지도 세조 의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의 악정을 간하다가 육 신을 찢기는 고문 끝에 유배길을 떠나던 홍언충은 노숙하면서 자신의 묘 비명을 짓고 있다. 연산조 때에는 유배지에 가면 사약을 내리는 것이 관 례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명천하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이요 이름은 언충이 며 반평생에 우활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라 서른둘에 생을 마치니 명 은 어찌 그다지도 짧으며 뜻은 어찌나 그다지도 긴고. 옛 고을 무림에 무덤을 정하니 천추만세 후에 누가 이곳을 지날는지 반드시 이무덤을 가 리키며 슬퍼할 이가 있을 것이다」 했다.
퇴계 이황도 묘비명을 써 아들 준에게 주었는데, 전면에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 라고 새겼을 뿐 벼슬도 품작도 신분도 이름도 없이 그저 아호와 본관만을 나타내는 겸허함을 보였던 것이다. 전라도 장성군 황룡 면 아곡리에 가면 명종때 명신 박수량의 무덤에 묘비가 서있는데 앞 뒤 에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다.
호조판서까지 역임한 그가 38년의 벼슬살이를 그만 두었을때 집 한채 도 없었을 만큼 청백했다. 그 청백을 죽어서까지도 지키려는 의도라기도 하고 죽을 즈음 세도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인지라 그 불의에 저항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이같은 백비 레지스탕스는 선비정신의 구현으로 관 습이 돼 있었다.
국립묘지에 비석없는 무덤은 없다. 신원 확인이 안되었으면 무명용사 라는 비명의 비석이라도 서있다. 한데, 장군 묘역에 있는 한 무덤에는 누구의 무덤인지도 알 수가 없는 유일하게 비명이 없는 백비 하나가 서 있어 백비전통을 잇고 있다. 지금 법의 저울 위에 올려지고 있는 12·12 군부쿠데타 당시에 장태완 장군과 더불어 신군부측에 저항하다가 부하가 쏜 총탄에 총상을 입고 강제 전역당하여 암울하게 살다 의혹을 남기고 죽은 정병주장군의 묘비인 것이다.
참군인 정신을 구현하다가 불의에 희생당한 원한 사무친 영혼인지라 저항 수단으로서의 백비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비면에서 넘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백비이기도 하다.
「비문 없는 묘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제1장군묘역 168호 육군 소장 정병주의 묘.
12.12 당시 신군부에 맞서다 직속 부하들에 의해 총상을 입고 강제 전역당했던 정병주 전특전사령관이 묻혀있는곳이다. 정씨는 89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후 이곳에 안치됐다. 그러나 정씨의 묘비는 7년째 백지 상태로 남아 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장군들의 묘비엔 동료 군인들이 헌사한 「추모의 글」이 빽빽이 새겨져 있다.
장씨의 묘가 무비문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 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유족들의 뜻에 따른 것. 그러나 5.18특별법 제정 발표 로 12.12와 5.18의 진실이 밝혀질 날이 다가오자 유족들은 가슴을 설레 며 비문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장남 승환씨(40·한성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다린 보람이 있어 아버 님의 비문을 만들 수 있게 됐다』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아버님도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망인 강남희 여사(64)는 연이은 충격을 받고 고혈압 증세를 보이는등 건강이 좋지 않 은 상태.
강여사는 5.18특별법제정소식에 오래 간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 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게 됐다』며 『참군인이었던 남편의 행적을 담은 좋은 비문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강제 전역당한후 당시의 악몽을 되새기며 우울증세를 보이다 89년3월 실종 1백30여일만에 경기도 고양군 산중턱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승환씨는 『수사결과 아버지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석연치않은 점이 많다』며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도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함께 진압군측에 서서 반란군에 대항하였던 대표적인 지휘관으로서 그는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달리 12.12 당시 이미 특전사를 지휘한지 5년이 넘은 시기여서 누구보다도 부대지휘에 자신이 있었고 전두환 소장의 격리작전에 의해 전두환 소장의 연희동 자택으로 유인되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납치소식을 접하고 원대복귀하여서도 전두환측에 의한 반란의 진압에 자신이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아끼고 보호하던 직속부하인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과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 준장 그리고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 준장 등 수도권에 있는 자신의 지휘하 4개 공수여단중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을 제외하고 모두 전두환 소장측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배신을 함으로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며 방금전에 지휘하며 부대장악을 지시하였던 직속부하인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제15대대 병력에 의해 총상까지 당하며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육사12기,하나회)은 그 여단장 선발과정에서도 정사령관의 도움을 받았으며 1978년 11월 충남 광천지역으로 침투한 3인조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실패(제1공수여단 지역으로 월북 도주)로 박 준장이 예편 직전에 놓였을 때도 정사령관이 그를 구출해 주기도 하는 등 그의 군인으로서의 은인이기도 하였으며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12기,하나회)도 자신의 동기생 중 마지막으로 장군진급을 하는데 정사령관이 앞서서 도와 주었으며 정사령관에게 충성맹세까지 한 장성이었고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도 그가 특전사령부에 전입할 때 중령이어서 그후 줄곧 정사령관 밑에서 작전참모로 보직하였으며 대령 진급 및 준장진급 때에 정사령관의 도움을 크게 받았던 그의 심복부하라고도 할 수 있던 자들이었으니 특전사령관으로 5년동안 근속하면서 예하 지휘관과 참모들을 너무도 믿고 사랑한 결과가 배신으로 보답되었으니 그 분함이 얼마나 크고 원한에 사무쳤으리라.
하여튼 자신들의 은인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총기를 사용까지 하여 살상케한 이들의 행태는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결국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12.12군사반란의 부당함을 증언하기 위하여 굿굿이 살아오다가 89년초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니 그의 사무친 원한을 푼 역사적인 12.12군사반란의 심판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육군소령
12.12군사반란 당시 군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산하한 한 젊은 장교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오랑 소령인 것이다.
비록 진압군측의 주요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그 중 한명인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끝까지 반란군으로부터 보호하다가 그들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인 제3공수여단 예하 15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의 병력에 의하여 살해되니 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셈이다.
사전에 반란군측의 특전사령부 기습공격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다 비명에 간 그이기에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세인들은 높이 칭송하고 있다.
후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모두들 배신을 하는 와중에서 유독 그를 목숨을 바침으로서 보좌하려 했던 부하의 잃음을 슬퍼하였다고 하니 이 비극적 사건은 세인들의 맘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 같다.
육군참모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육군소령과 특
별경호실장 김인선 육군대위
이들은 12.12당시 반란군측의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육군대장의 수행부관 및 특별경호장교로서 정총장을 보좌하였으나 정총장의 강제연행과정에서 반란군측의 총기난사로 치명상을 입으면서도 의식회복후 유혈이 낭자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몸은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육본 수뇌부에게 전두환측의 정총장 납치사실을 알림으로 해서 진압군측 초기 상황 파악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더욱이 이중 특별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는 외부에 이러한 정총장 연행사실을 알리려다 반란군측으로부터 얼굴등에 5발이나 총상을 입는 치명상을 입었으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그날의 반란군의 불법적인 만행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들의 군인으로서의 투철한 사명의식은 반란군측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아군에게도 서슴없이 불법적 총기사용을 한 반란군측의 행태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흐르는 음악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입니다....
고 정병주 특전사 사령관의 아드님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랍니다...
고 정병주 특전사 사령관은 아드님에게 이땅에 민주화와 남북통일에 전념하라고
했다는군요...... 또한 명동성당에서 아드님과 며느님이 세례를 받을때 성당 밖에서
소낙비를 맞으면서 이땅에 군정종식과 민주화, 남북통일, 미군철수를 빌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