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gallery/Cup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young/brod.js></script> 홍콩 구치소, 한국인 1000명
- WTO 반대 홍콩 원정 투쟁기(19)
12월17일 저녁 10시쯤에서부터 홍콩경찰에 봉쇄된 한국원정 투쟁단은 아스팔트위에서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꼼짝없이 갇혀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전날 행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홍콩경찰이 체포를 위해 최루탄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랩으로 눈을 가리고 보안경까지 쓴 모습은 추위에 떨고 있는 외계인(?)의 모습과 흡사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집회와 문화공연도 추위와 쏟아지는 잠을 모두 이겨낼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몸을 움츠린 채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추위를 이겨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새벽이 깊어가면서 추위를 견디지 못한 대오에서는 홍콩 경찰을 향해 “차라리 빨리 연행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드디어 새벽 3시경 조여들었던 홍콩경찰로부터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도로교통법과 집시법 위반 등으로 연행에 돌입하겠다는 메시지였다. 방송은 홍콩 거주 한국인의 목소리다.(이후 연행과정에서부터 조사, 구치소 수감 등 모든 과정에서 현지거주 한국인, 한국인유학생 등은 홍콩경찰의 통역사 역할을 수행했다.) 처음 연행이 시작되었을 때 제일앞쪽에 연좌 농성 중이던 여성농민들은 저항을 시작했다. 홍콩 여자경찰은 여성 농민 1명에 2~3명이 한조가 되어 연행했다. 한국처럼 대규모 연행 시에는 가능한 호송버스를 일렬로 세워 놓고 무조건 태운 뒤 경찰서로 분산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홍콩 경찰의 연행방식을 호송차 1대를 대기시킨 뒤 1명씩 차에 태우고 인원이 채워지면 출발하고 다음 차가 들어오는 식으로 ‘만만디’도 그런 만만디(“천천히”)가 없다. 호송차량도 두 명이 앉는 좌석 안쪽에는 연행된 사람이 앉고 바깥쪽에는 경찰이 앉는 식으로 물 반 고기반인데 전체적로 호송차 안에는 경찰이 더 많다. 680만 홍콩인구에 경찰이 14만 명이라면 한국의 전경을 뺀 전체 경찰수보다 많다. 정말 할일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처음 연행된 여성농민을 비롯한 여성동지들은 손에 수갑 차는 것을 거부하는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홍콩경찰에 의해 폭행 등 인권유린을 당했다. 이런 식으로 연행을 했다가는 24시간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서 초기 연행 뒤부터는 일단 순순히 차량에 올라타기로 했다. 날씨도 춥고 1천명이 넘는 대오가 기다리는 것을 생각해서 가능한 한 협조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빨리 구치소든 유치장이든 들어가는 것이 추위를 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홍콩경찰 호송버스는 대형버스보다는 중형버스가 더 많았다. 그래서 엄청난 대오를 연행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앞부분에서 연행되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새벽 3시에 시작된 연행은 이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연행하는 데만 12시간이 걸린 것이다.
경찰 호송차로 연행된 대오는 경찰서 마당에 내려졌다. 조사장소는 실내가 아니라 바깥이었다. 소나 돼지우리처럼 만들어진 통로에서 여권이 압수되어 수갑을 찬 채 도열해 있었다. 강제로 사진을 찍고 지문 채취까지 당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동지는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완전히 범죄자 취급이었다. 이곳에서도 최소한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조사절차가 끝나자 손목에 번호표가 채워진 채 다시 경찰 호송차에 실려 쿤통 법원에 딸린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한국 투쟁단을 25개 구치소와 경찰 유치장에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한국시위대를 수감할 감옥을 별도 마련한다는 계획은 벌써 몇 달 전부터 계획되었다.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었다. 500~600명 정도를 예상한다고 했다. 그러나 1,000명이 넘는 연행자는 홍콩경찰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 것 같다.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필자는 3~4평되는 방에 12명과 함께 수용되었다. 시멘트바닥에 모포 몇 장이 전부였다. 12명 모두 다리를 펴고 누울 수도 없었다. 화장지, 컵, 비누, 칫솔, 치약, 수건 등 아무것도 없었다. 물은 종이컵을 식구 통에 내밀면 조금씩 부어주었고 화장지도 정말 부족한 양만을 잘라서 넣어주었다. 옆방, 건넌방 등에 가득 찬 홍콩 원정투쟁단은 서로 통방을 하면서 바깥 상황을 공유하려 노력했으나 첫날은 전체 상황이 깜깜했다. 각방에는 물이며 화장지며 필요한 물품을 요구하는 함성이 이어졌다. 첫날부터 들어온 식사는 맨밥에 소시지 몇 개로 먹기가 정말 괴로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수감자들은 모두 불려나갔고 가지고 있던 소지품은 모두 압수당했다. 밀봉된 봉투에 담아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처음 들어왔던 방에서 다른 방으로 바꿔버렸다. 그날 오후 쯤 홍콩국회의원이자 변호사와 홍콩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한국인 통역자와 함께 민주노총의 몇 명을 면회하였다. 그들은 연행과정에서의 인권유린, 구치소 내에서는 불편한 점 등에 대해 상세하게 물었다. 우리는 초기 연행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한 점, 강제로 수갑을 채우고, 사진을 찍게 했으며, 지문을 채취한 홍콩경찰의 인권유린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좁은 방에 많은 사람들을 수감하고 방안에는 아무런 물품도 없으며 추운 시멘트바닥에 모포는 부족하다고 했다. 이들은 홍콩경찰 당국에 가능한 한 불편한 점을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몇 가지 얘기를 덧붙였다. 홍콩국회의원이자 변호사인 그는 이번 한국에서 온 원정 투쟁단들의 활동과 투쟁이 홍콩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얘기였다.
또 인권단체에서 나온 다른 사람은 자신이 오늘 아침 출근하기 전 봤다는 홍콩의 TV 중 학부모들을 다루는 프로시간을 소개했다. 한 홍콩어린이가 한국인 시위대에 대해 묻자, 그 어머니는 한국인들은 지금 그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으므로 정당한 일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그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면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자 갇혀있던 노동자, 농민들은 무슨 희소식이라도 있을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얘기는 없었다. 오히려 궁금증만 더 할 뿐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50 ~60명이 구속될 거라는 소문도 있고 홍콩경찰당국이 아니라 홍콩민주화에 두려움을 느끼는 중국당국의 입장에서 홍콩의 680만 시민의 마음을 움직인 한국 투쟁단을 그냥 귀국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도 있고 하여 사람들은 내심 불안해하였다.
일주일 간의 격정적인 투쟁을 끝내고 귀국의 꿈에 부풀어 있던 한국투쟁단으로서는 우리 안에 갇힌 맹수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 내린 폭설로 빨리 돌아가야만 하는 농민들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노조전임자가 아닌 상황에서 월요일부터 출근해야 하는 평조합원의 경우도 매우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하루가 지나자 여성동지들은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홍콩당국도 연행과정에서 여성들에 대한 인권유린 등이 문제가 된다는 점을 생각했던지 여성들을 먼저 석방하였다. 한국에서는 외무부차관이 홍콩으로 날아와 구치소에 왔고 홍콩영사관과 직원들도 구치소로 왔다. 민주노총, 전농 투쟁단장이 그들을 만났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뿐이었다. 그럭저럭 48시간이 되었고 11명을 제외하고는 풀려나게 되었다. 민주노총 2명, 전농 8명, 카톨릭 농민회 1명 등 총 11명은 홍콩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이날 저녁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쿤통 구치소에서 풀려나던 시간은 이틀이 지난 12월20일 새벽 3시 무렵이었다. 구치소 앞에는 홍콩민주단체에서 나온 사람들과 먼저 풀려난 여성동지 그리고 상황실에 나온 동지들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프랭카드를 들고 홍콩경찰의 만행을 규탄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숙소인 유스호스텔(옛 영국군 주둔지)에 도착했다. 이미 숙소는 계약기간이 끝나 짐들은 한곳에 모아져 있었다. 다시 숙소를 배정받았다. 갇혔던 투쟁단원들은 샤워를 하고 컵라면의 시원한 국물과 함께 이틀간의 구치소생활과 향후대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몇 시간의 눈을 붙이고 오후부터 비행기 표가 되는대로 공항으로 출발한다. 하루나 이틀 기다려야 하는 사람도 있다. 구속된 동지들 때문에 홍콩에 남아있어야 할 사람도 있다. 필자는 이날 1시 비행기로 홍콩을 출발했다.
공항에는 홍콩기자 몇몇이 취재차 몰려들었다.(처음 홍콩에 도착했을 때 몰려든 기자들의 절반 이상이 경찰이었다고 했다.) 질문의 내용은 구치소 생활, 홍콩경찰 대응에 대한 것이었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 투쟁단원들은 홍콩시민들의 환대와 반응은 좋았으나 홍콩당국(경찰)의 대응은 “매우 나빴다”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WTO의 본지로가 그를 둘러싼 논쟁점이 사라진 점이었다. 그리고 11명의 구속자를 홍콩에 두고 떠나는 일이었다. 비행기가 홍콩공항을 이륙했다. 조만간에 우리 앞에 다가올 중국제국주의의 모습을 예감했다. 구치소 내에서 한 방에 갇혀있었던 전농동지의 얘기도 생생하다.
“늘어나는 농가 빚에 쪼들려 자살하거나 가정이 파산하고, 경찰에 맞아죽거나 이판사판이다.” 다음기회에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하는 민중집회가 있으면 홍콩 ‘D3 감방’에 함께 했던 동지들은 차라도 한잔 하자고 약속했다. 홍콩경찰과 구치소가 가두려고 했던 것은 홍콩 민주화이자 WTO 반대투쟁의지였다. 그러나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과 노동자, 농민들의 자본의 수탈과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정신은 결코 갇히지 않을 것이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민중들의 반전 반자본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200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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