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도덕적이어야 한다. 노조 간부, 특히 소위 ‘민주노조’라는 이름을 걸고 부당함에 맞서 투쟁하는 간부라면 더욱 그렇다. 민주노조는 세금 탈루를 비롯해 각종 불법과 탈법이 다반사인 기업주를 상대로 싸워온, 그리고 싸워야 할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기업주 비리는 웬만한 규모가 아니면 국민들 관심거리도 안 되지만, 노조 간부가 비리를 저지르면 언론들이 살벌하게 달려들어 물어뜯곤 한다.
지난해 8월 금속노조가 그렇게 상처를 입어야 했다. 금속노조 대전충북지회 소속 ASA지회 전 사무장 전 모 씨가 4억원이 넘는 공금을 횡령해 오피스텔 구매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다. 게다가 횡령한 돈 중 대부분은 노조가 6개월 이상 장기간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조합원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해 지회에 지급한 것이었다.
일개 사업장의 비리라곤 하나 이 사건으로 금속노조가 입은 피해는 4억원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난해 노조는 고갈된 장기투쟁대책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합원 1인당 1만원을 결의하는 등 노동자 연대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소중한 기금이 조합원 몰래 개인적 용도로 사용됐으니, 금속노조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공금횡령 비리의 아픈 기억 간직한 ASA 해고자들
하지만 당시 누구보다 큰 상처를 입고 직접적인 고통에 시달린 것은 ASA지회 조합원들이었다. “생각만 해도 분노가 끓어오르죠. 지회 설립부터 함께했던 사람이라 믿고서 조합 살림 전부 맡긴 거였는데….” 29일 ASA 공장 앞 비닐하우스 농성장에서 만난 김성길 ASA지회장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김 지회장에 따르면 전 씨가 사무장을 하던 시절, 지회가 다른 사업장 연대투쟁에 갈 때면 여성 조합원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 등으로 먹을거리를 마련하곤 했다고 한다. 금속노조가 전국의 조합원들을 집중시켜 집회를 열면, 조합비로 식대와 교통비를 지급하는 데 이것조차 빼돌린 탓이다. 김 지회장은 이 때문에 여성조합원들이 특히 전 씨에 대한 분노가 크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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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길 ASA지회장(가운데)과 조합원들이 공장 앞 비닐하우스 천막 앞에서 신년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김상민 |
공금횡령 비리가 알려진지 7개월이 지났지만 ASA지회에게 있어 이 사건으로 인한 아픔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비리사건 전에는 노조 지역지부 결의금이나 재정사업으로 남는 돈 외에도 지역 동지들의 자발적인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로 이 같은 도움이 뚝 끊겼다. 재정사업과 지부 지원으로 충당하기에는 지회 운영과 투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는 현실. “농성장 발전기 기름값을 충당하기도 버거운 수준이죠. 집회 참가비용조차 마련할 여력이 안 될 때 참 서글퍼요. 노조로부터 돈을 받기 전에 지회가 미리 지급해야 하는 데 그게 쉽지 않을 때가 있어요.” 김 지회장의 하소연이다.
농성장을 지키는 간부들은 생계비를 절약하기 위해 매일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며 선전전과 출근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처지다. 조합원 53명 중 대부분은 생계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못 구해 이들 역시 힘들긴 마찬가지다. 연이은 자살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똑같은 이유, ‘노사분규 사업장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문제다. 이 때문에 아르바이트와 일용직을 전전하거나 아예 가족과 고향을 떠나 고기잡이배를 타러 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부족한 지회 재정이나 생활난이 아니다. “비리 저지른 전직 간부와 한통속 아니냐는 주변 동지들의 편견어린 시선. 이게 저희를 제일 힘들게 합니다.” 김 지회장은 “비리 사건 이후로는 당당하게 연대를 호소하지도 못했다”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재정부족과 생계난 보다 더 힘든 건 동지들의 시선”
“함께 조합 활동을 한 사람의 잘못을 막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우리가 감수해야할 몫”이라고 말하는 김 지회장. 전 집행부 시절 벌어진 비리지만 이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무거워 보인다. 실제로 주변에선 지회를 해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거운 짐 마다않고 금속노조 깃발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왜일까. 정해욱 지회 대의원은 “다른 데 가고 싶은 마음도 한 때 있었지만, 지금은 억울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옳은 일 하다 쫓겨난 건데 분해서 그만둘 수 없다는 것. 정 대의원은 “조합활동 하면서 온갖 경험을 다하다 보니 어려운 사람들 위해 싸우는 것에 의미를 찾게 됐다”며 “이길 때까지 싸우겠다”고 덧붙였다.
김 지회장은 이 질문에 조합활동 초기 어린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체불, 시간외 근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당시 ASA지회는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지회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모범을 보였다. 김 지회장은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자며 나섰던 조합원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ASA 공장 안에는 같은 환경 속에서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강도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해고당한 조합원을 위해서라도, 공장안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서라도 노조 깃발만은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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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SA지회가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공동투쟁위원회를 꾸리고, 현장복귀를 위한 본격적인 투쟁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공동투쟁위원회가 3월 29일 금산군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상민 |
이제 ASA지회가 아픔을 딛고 다시금 투쟁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29일 금산군청에서 투쟁선포 기자회견을 연 지회는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해 현장 복귀를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칠 계획이다. 김 지회장은 “새 집행부가 새로 시작하는 투쟁이니만큼 지지해 달라. 적어도 왜곡하거나 편견을 갖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투쟁…“이제 편견 거둬 주세요”
여기서 김 지회장이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기억. 지회 설립 초기 같은 대전충북지부 소속 PLA지회와 코스모링크지회에 용역이 투입됐을 때 일 손 놓고 달려가 지역 동지들과 연대해 싸웠던 일이다. 현장에 돌아가게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는 질문에, 노동조합 활동부터 제대로 복구해 그 당시처럼 힘 있는 연대투쟁을 벌이겠다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이들. 그 때가 되면 지금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